부끄러움

조회 수 3990 추천 수 10 2010.04.26 20:13:02



부끄러움/윤오영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나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누이뻘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切戚)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 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가 몸매며 옷매무새는 열 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꾼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넌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을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넌방은 조용하고 깨끗하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 냈다.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는 훨씬 성숙해 보였다. 지금 막 건넌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박이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고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분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 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 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 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 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홀낏 홈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빰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사진/귀엽님


봄비가 내리네요.
그리 반가운것도 또 그리 싫지도 않습니다.
그리 세차지도 또 아니 오는듯 마는듯 도 아니고
그저 봄 나들이에 한동안 들떴던 마음, 조금 가라앉히기 좋을 만큼입니다.
덕분에 자꾸 읽어도 좋은 수필 몇편 읽었습니다.
위 수필 속에 닭국에 말은 밀국수가 나오는데
저는 늦은 점심으로 멸치육수에 부추를 넣어 끓인 잔치국수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저녁 생각은 없고 육수도 부추도 남았는데
부추전을 부쳐서 쨘~ 한잔 할까요...ㅎㅎ


새로운 한주도 또 활기차고 즐겁게 지내기로 해요.^^


김귀엽

2010.04.26 23:02:22
*.143.66.160

봄비가 아니라 장마비.
봄을 제대로 느껴 보지도 못하고 여름이 와 버릴거 같아요.

멸치육수로 만든 잔치국수는 저녁밥 먹고도 한그릇 더 먹을 수 있습니다.
부추전이야 맨입에 먹어도 좋지만
쨘~하고 한잔 듣던 중 반가운 말^^.


오늘 밤엔 영이님이 올려주신 수필을 읽으며 저도 오래전 읽었던
윤오영님의 '수필문학입문'을 다시 꺼내 읽어봅니다.

집안에 들여 놓으니 밤이 밤인 줄 모르고 봄맞이꽃 더욱 활짝 피었답니다.

김귀엽

2010.04.26 23:12:30
*.143.66.160



장미

피천득


잠이 깨면 바라다보려고 장미 일곱 송이를 샀다. 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이 내 꽃을 보고 간다. 여학생들도 내 꽃을 보고 간다. 전차를 기다리고 섰다가 Y를 만났다. 언제나 그는 나를 보면 웃더니, 오늘은 웃지를 않는다. 부인이 달포째 앓는데, 약 지으러 갈 돈도 떨어졌다고 한다. 나에게도 가진 돈이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부인께 갖다드리라고 장미 두 송이를 주었다.

Y와 헤어져서 동대문 행 전차를 탔다. 팔에 안긴 아기가 자나 하고 들여다보는 엄마와 같이 종이에 싸인 장미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문득 C의 화병에 시든 꽃이 그냥 꽂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전차가 벌써 종로를 지났으나 그 화병을 그냥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사직동에 있는 C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C는 아직 들어오질 않았다. 나는 그의 꽃병에 물을 갈아준 뒤에, 가지고 갔던 꽃 중에서 두 송이를 꽂아놓았다. 그리고 딸을 두고 오는 어머니와 같이 뒤를 돌아보며 그 집을 나왔다.

숭삼동에서 전차를 내려서 남은 세 송이의 장미가 시들세라 빨리 걸어가노라니 누군지 뒤에서 나를 찾는다. K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다. K가 내 꽃을 탐내는 듯이 보았다. 나는 남은 꽃송이를 다 주고 말았다. 그는 미안해 하지도 않고 받아가지고는 달아난다.

집에 와서 꽃 사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는 꽃병을 보니 미안하다. 그리고 그 꽃 일곱 송이는 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었지만, 장미 한 송이라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

영이

2010.04.27 22:46:31
*.137.66.40

잠이 깨면 바라다보려고....

다음 대목으로 눈길을 옮기지 않고 한참을 머물러 있었답니다.
잠이 깨면 조용히 바라다 볼 아름다운 무언가를 준비해 둘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
살면서 언제쯤이면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 수필들을 읽으면 괜히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요.


낮에 자주 가는 포구에 가서 싱싱한 꽃게와 조개류를 사가지고 왔어요.
바닷바람이 몹시 거칠게 불었고 사람들은 몇 보이질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수산물을 파는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습니다.
세식구 먹을 찬거리 많이 필요치는 않았지만 넉넉히 장바구니에 담아 왔답니다.
오늘 저녁은 맑은 조개탕, 내일은 꽃게로 요리를 해 볼 참이에요.
찜을 할까...탕을 할까 고민입니다...ㅎㅎ


지원

2010.05.04 17:24:57
*.247.237.75

저도 어느날 살아있는 꽃게 몇 마리 넣고 꽃게탕 했더니... 정말 맛있던데요...
어떻게 뭘로 해 드셨는지... 궁금한데요... *^^*
윤오영님의 수필... 참 좋죠... 저도 책꽂이에서 잠자고 있을 "방망이 깎던 노인"...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영이

2010.05.07 08:18:20
*.137.66.52

여기는 서해가 가까워 조금 부지런히 움직이면 싱싱한 조개류와 꽃게를 먹을 수 있답니다.
가끔씩 포구에 가서 구경도 하고 해산물도 사고...
저번 그때엔 찜을 해서 먹었답니다. 날씨가 그때 추워서 탕을 하고 싶었으나 주 고객이? 찜을 원해서요.ㅎㅎ

올해는 흐린날이 워낙 많아 카메라 들고 나가며 책도 꼭 한 두권 챙겨 넣게 됩니다.
한적한 들판길에 차 세워놓고 먹는 김밥,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들 보며 시집이나 사진이 있는 책 한권...

지원

2010.05.22 19:58:40
*.150.29.147

영이님 서해쪽에 사시는군요. 게찜 좋죠... 저는 얼큰한 국물 있는 음식이 좋아요.
길 위에서 먹는 김밥, 길 위에서 읽는 시의 맛은 어떠할까요.
언젠가 저도 꼭 그 맛을 느껴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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