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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로 대답하기 / 윤이현


해님은 날마다
출석을 그림자로 확인한다.


온 세상 모두가
일 학년 교실처럼 대답하다가는
지구의 귀가 터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키 큰 가로수는 길게
세살배기 우리 아가는 짧게

육 학년 언니는 조금 길게
모두모두 그림자로 대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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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깨어 있네 / 이해인



나는

늘 작아서

힘이 없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운데

그래도 괜찮다고

당신은 내게 말하더군요


살아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희망이라고

내가 다시 말해주는

나의 작은 희망인 당신

고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숨을 쉽니다

힘든 일 있어도

노래를 부릅니다

자면서도 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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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위하여 / 정호승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 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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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 윤희상



화가는
바람을 그리기 위해
바람을 그리지 않고
바람에 뒤척거리는
수선화를 그렸다
바람에는 붓도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바람은 보지 않고
수선화만 보고 갔다
화가가 나서서
탓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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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 꽃 피어 /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산 활활

타오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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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 / 고영민



입이 둥근 물고기가 모여 사는

어탕집 평상 위에

할머니 넷이 나앉아 소리나게 웃는다

어디서 오는 걸까, 저 민물의 웃음은

꼬박 육칠십 년,

합치면 이백 년을 족히 넘게

이 강 여울에 살았을 법한

강 건너 호두나무 숲이 바람에 일렁인다

긴 지느러미의

물풀처럼

어탕이 끓는 동안

깜박 잠이 든 세 살 딸애가

자면서 웃는다

오후의 볕이 기우는 사이,

어디를 갔다 오느냐

이제 막 민물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아가미의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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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나태주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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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의 강물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
 섣불리 도우려고 나서지 말아라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성급한 도움이 그를 골나게 하거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벗어난 별을 보거든
 별에게 충고하지 말고 참아라
 별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ㅡ장 루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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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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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 / 김기주 

 

절간 소반 위에 놓여 있는
금이 간 화병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물을 더 부어 봐도
화병을 쥐고 흔들어 봐도
물은 천천히, 이게
꽃이 피는 속도라는 듯
조용하게 흘러나온다
아무 일 없는 외진 방안
잠시 핀 꽃잎을 바라보느라
탁자 위에 생긴 작은 웅덩이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꽃잎보다 키를 낮출 수 없는지
뿌리를 보려하지 않았다


한 쪽 귀퉁이가 닳은 색 바랜 소반만이
길 잃은 물방울들을 돕고 있었다
서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물방울들에게,
가두지 않고도 높이를 갖는 법을
모나지 않게 모이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무릎보다 낮은 곳
달빛 같은 동자승의 얼굴이
오래도 머물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