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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꽃 / 이문구

 

 

큰 바람이 일고 싶은지
저 먼 산기슭에
자욱한 는개같이
바람꽃이 피었다.
아기 바람이 일면
큰 바람이 일어서
아기의 말을
아빠가 더 잘 듣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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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나를 들어 올린다 / 손택수

 

                                   

구두 뒤축이 들렸다 닳을 대로 닳아서

뒤축과 땅 사이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공간이 생겼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구두코를 닦으며

걸어오는 동안, 길이

이 지긋지긋한 길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나 보다

닳는 만큼, 발등이 부어오르는 만큼 뒤꿈치를 볼끈

들어 올려 주고 있었나 보다

가끔씩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기운다는 건

내 뒤축이 허공을 딛고 있다는 얘기

허공을 디디며 걷고 있다는 얘기

이제 내가 딛는 것의 반은 땅이고

반은 허공이다 그 사이에

내 낡은 구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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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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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나무/정희성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을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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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 김강태

 

 

꽃 지는 소리마저 없다
언젠가 꽃이 열렸는지 알 수가 없다
꽃이 없다
그림자를 벗어 던지고 던진 꽃잎이 없다
새끼를 밴 아픔이 없다
마지막 흘린 땀자욱도 없다
비어 있지는 않지만
내가 없으니 모두가 없어라
구름꽃 무늬진 바다인가 저 머얼리
문득 바람이 푸르르니 보인다
스스로 없다 답하는 이 없다
보일 듯 말 듯
꽃 지는 소리마저 없다
꽃의 자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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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 김강태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보기
 
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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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꽃 / 김용택

 


수천 수만 송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납니다
생각에 생각을 보태며
나도 한송이 들국으로
그대 곁에
가만가만 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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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 마종기

 

 

산들바람 한 줄기
마당을 지나
가지런히 놓인
신발 앞에 머물고

 

보스락보스락
가랑잎
신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혼자
맴돌고

 

걸어서 가는 것 보다
날아가는 게
더 신날거야

 

바람은
가랑잎 데리고
함께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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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환 / 심호택

 

 

머릿장 빼다지에서 훔친
불그죽죽한 오십환짜리는
제법 쓸모가 있었다

 

애들하고 콩사탕 박하사탕을 물고
마을로 들어오는데

논바닥에 해오라기 마냥 엎드린
어머니와 형이 보였다

 

논두렁에서 암만 기다려도
알은체하지 않고 귀먹은 중마냥
하던 일만 하고 있었다

 

답답해서 내가 먼저 말 꺼냈다
공연히 큰 목소리로
내가 안 끄내갔다 말여!
정말 안 끄내갔단 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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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솔 그늘에 앉아 / 이제하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

 

혹은 하얀 햇빛 깔린
어느 도서관 뒤뜰이라 해도 좋아

 

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
아늑한 얘기가 하고 싶어

 

아니 그냥
당신의 그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어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

 

청솔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