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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잠/이재무

     

    꽃 피운 목련나무 그늘에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 펼쳐놓는다
    아니 시는 건성으로 읽고
    행간과 행간 사이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햇살은 낱알로 내려 뜰 가득 고봉으로
    소복 쌓이고 시집 속 봄볕에
    나른해진 글자들
    겯고 튼 폼 뒤틀다가 하나 둘 셋
    느슨하게 깍지를 풀고
    꼬물꼬물, 자음과 모음 벌레 되어 기어나온다
    줄기와 가지 따라 오르고
    꽃 치마 속 파고들기도 한다
    간지러운 듯 나무가 웃고
    꽃은 벙글벙글
    이마에 책 쓰고 누워
    배 맛처럼 달고 옅은 꽃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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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도 그림자가 / 나희덕




소나기 한 차례 지나고

과일 파는 할머니 비 맞으며 앉아 있던 자리

사과 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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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렴 / 강현국

    큰일났다, 봄이 왔다
    비슬산 가는 길이 꿈틀거린다
    꿈틀꿈틀 기어가는 논둑 밑에서
    큰일났다, 봄이 왔다 지렁이 굼벵이가 꿈틀거린다
    정지할 수 없는 어떤 기막힘이 있어
    色쓰는 풀꽃 좀 봐
    伐木丁丁 딱따구리 봐
    봄이 왔다, 큰일났다
    가난한 내 사랑도 꿈틀거린다


     

클났어요. 봄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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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을 보려면 / 정호승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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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사람, 소리 / 이면우

      

     

    '열화당 사진문고' 『최민식』을 공사장 오가는
    버스 속에서 처음 펼쳐보다 그땐 눈 밝아
    '부산 부민동 1963'의 빼곡한 집들 가볍게 훑고 지나쳤다.

     

    그곳 사람들 처음 만난 건 십년 뒤 돋보기 쓰고 나서다
    서가 먼지 털다 다시 그 집들 들여다보다 움찔했다
    거기 많은 이들, 놀고 일하고 공부하고 아프며
    하늘 가까운 동네를 살아내는 중이다 나는 확대경까지 보태
    모든 집, 마당, 골목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다 밑에서
    위로 두번째 줄, 왼쪽부터 다섯번째 집
    어둔 방안에서 햇볕 비치는 이쪽 향해 앉은걸음으로
    막 나오려는 이를 보았다 그가 무슨 말 하려는 순간 찰칵
    영영 멈춰버렸다고 그게 자꾸 궁금했다.

     

    그때, 가까이서, 약 먹을 물 한 그릇 떠달라는 아이 엄마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진은 2012-11-29-부산 감천동 문화마을...

    -본인의 허락을 맡고 몇 컷 촬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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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구비 만 구비 / 이승훈

 

 

  천 구비 만 구비 돌아 그대 만나면 그대 말 없이 선물만 주네 푸른 바람도 그대 선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그대 선물 카페 창 너머 맑은 하늘도 그대 선물 카페도 카페도 그대 선물이다 나 그대 선물 받고 한 세상 사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천 구비 만 구비가 지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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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꽃 한송이만 있겠는가

저쪽

마른 강바닥에도 아랑곳하게나

볼품없음이

그대 임이겠네

 

 

 

고은 詩

순간의 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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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회항 / 공광규

 

 

 

멀리 순항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비상착륙을 하려면
항공유를 모두 버리고 무게를 줄여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안전한 착륙을 위하여
정상항로를 벗어나서
비싼 항공유를 모두 바다에 버리고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자신을 비우고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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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에 대하여 / 복효근

 

 

문자를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끝이라는 거다
마침표는 씨알을 닮았다
하필이면 네모도 세모도 아니고 둥그런 씨알 모양이란 말이냐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뜻이다
누구의 마침표냐
반쯤은 땅에 묻히고 반쯤은 하늘 향해 솟은
오늘 새로 생긴 저 무덤
무엇의 씨알이라는 듯 둥글다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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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