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

글 수 273
  • Skin Info

 

문서 첨부 제한 : 0Byte/ 50.00MB
파일 크기 제한 : 50.00MB (허용 확장자 : *.*)

IMG_0040-1.jpg

 

 

아름다운 회항 / 공광규

 

 

 

멀리 순항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비상착륙을 하려면
항공유를 모두 버리고 무게를 줄여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안전한 착륙을 위하여
정상항로를 벗어나서
비싼 항공유를 모두 바다에 버리고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자신을 비우고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할 때가 있다

 

 

IMG_0033-1.jpg

 

 

마침표에 대하여 / 복효근

 

 

문자를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끝이라는 거다
마침표는 씨알을 닮았다
하필이면 네모도 세모도 아니고 둥그런 씨알 모양이란 말이냐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뜻이다
누구의 마침표냐
반쯤은 땅에 묻히고 반쯤은 하늘 향해 솟은
오늘 새로 생긴 저 무덤
무엇의 씨알이라는 듯 둥글다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거다

 

 

 

20121228-31.jpg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0976165794f947a78e5a438cacbee9ad.jpg

 

급한 물에 떠내려 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


이렇게 시작해 보거라


 

*

 

 

 

a.JPG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들녘을

물끄러미 보다

한평생 일하고 나서 묻힌

할아버지의 무덤

물끄러미 보다

 

나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

 

b.JPG

 

 

두 거지가

얻은 밥 나눠먹고 있다

 

초승달 힘차게 빛나고 있다

 

*

 

c.JPG

 

 

할머니가 말하셨다

아주 사소한 일

바늘에

실 꿰는 것도 온몸으로 하거라

 

요즘은 바늘구멍이 안 보여

 

*

 

d.JPG

 

 

어미가 새끼 부를 때

새끼가 어미 부를 때

그 분주한 새소리

앞산의 다른 새들도 듣는다

 

*

 

e.JPG

 

 

어쩌란 말이냐

복사꽃잎

빈집에 하루 내내 날아든다

 

*

 

f.JPG

 

 

친구를 가져보아라

적을 안다

적을 가져보아라

친구를 안다

 

이 무슨 장난인가

 

*

 

 

ㅡ고은 님의 순간의 꽃* 중에서

 

 

 

 

 

 

11-01.jpg

 

 

청도(淸道)가며/정일근

 

서지월 시인에게-

 

 

청도는 맑은 길, 그 맑은 길을 따라 좋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가을, 나도 덩달아 눈이 맑아진다. 길가에 나서 쭈그리고 않은 할머니들의 작은 광주리에 담긴 감홍시. 그 몇 알에 묻어나는 무심의 가르침을 나는 읽는다. 과속으로 질주하는 차량들이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가지만, 누구도 아쉬워하거나 다음 차를 기다리지 않는다. 과속이 그들에게 삶이 아니듯, 느릿느릿 걸어 생의 가을에 닿아 감홍시처럼 늙어버린 사람들. 푸르고 딱딱한 감이 화엄 같은 불볕 여름을 견뎌 붉고 부드러운 순명에 닿듯, 세상의 법 가운데 자연의 법이 최고임을 그들은 이미 아는 것이다. 눈이 맑은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감 홍시 몇 알을 청할 것이니, 길가에 앉은 저 금강의 앉음새는 어떤 질주나 과속에도 무심할 것이다, 고 나는 적는다. 청도는 맑은 길, 좋은 친구도 스스로 익어 빛나는 가을과 함께 그 길 곁에서 나를 기다리려니.  

 

 5805.jpg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도종환

     

    분명히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사랑한다고 말한 그 사람도 없고
    사랑도 없다

     

    사랑이 어떻게 사라지고 만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멀어져 가고
    사랑도 빛을 잃어간다

     

    시간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은 없으며
    낡고 때 묻고 시들지 않은 것은 없다

     

    세월의 달력 한 장을 찢으며
    벌써 내가 이런 나이가 되다니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날이 있다

     

    얼핏 스치는 감출 수 없는 주름 하나를 바라보며
    거울에서 눈을 돌리는 때가 있다

     

    살면서 가장 잡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나 자신이었다

     

    붙잡아 두지 못해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것
    흘러가고 변해 가는 것을

    그저 망연히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늦게 깨닫는 날이 있다

     

    시간도 사랑도 나뭇잎 하나도 어제의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늘 흐르고
    쉼없이 변하고 항상 떠나간다

     

    이 초겨울 아침도,
    첫눈도,
    그대 사랑도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5980.jpg

 

     

    짧은 해/김용택

     

     

    당신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기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갈대가 하얗게 피고
    바람 부는 강변에 서면
    해는 짧고
    당신이 그립습니다.

     

 15.JPG

 

 

    시월하늘 / 김석규

     

    철새 돌아오는 때를 알아 누가 하늘 대문을 열어 놓았나.

    태풍에 허리를 다친 풀잎들은 시든 채 오솔길을 걷고

    황홀했던 구름의 흰 궁전도 하나둘 스러져간 강변

    시월하늘 눈이 시리도록 너무 높고 맑고 푸르러

    어디에 하늘 한 만 평쯤 장만할 수 있을지

    주민등록증하고 인감도장을 챙겨들고 나가봐야겠다.

     

     

     

20121007cats.jpg

 

 

실없이 가을을 / 나해철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 가을을
갑자기 맞닥뜨리고
빌딩으로 돌아와서
일하다가
먼 친구에게 큰 숨 한 번
내쉬듯 전화한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니
좋다고
불현듯 생각한다
가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와 있어서
그를 그렇게라도 보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