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꽃 / 고은

조회 수 1523 추천 수 0 2013.01.11 11:28:22

 *

겨울 잔설 경건하여라

낙엽송들

빈 몸으로

쭈뼛

쭈뼛 서서

어떤 말에도 거짓이 없다

 

이런 데를 감히 내가 지나가고 있다

 

 

 

*

어미 기린이

남의 새끼에게도

간절히 젖을 먹인다

 

순철이 엄마 먼 데 쳐다보며

어미 없는 호길이 동생에게 차가운 젖 물려준다

 

 

 

*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옆자리에서

오늘 하루 번 것을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있다

 

소주 마시는

두 젊은이

벌써 지아비이고 아비로다

 

 

 

 *

4월 30일

저 서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

두 거지가
얻은 밥 나눠먹고 있다

 

초승달 힘차게 빛나고 있다

 

 

 

*

길 한복판

개 두 녀석이 붙어 있다

 

나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

뭐니 뭐니 해도
호수는
누구와 헤어진 뒤
거기 있더라

 

 

 

 *

마당에서 눈 내리고

방 안에서 모르네

 

 

*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

이 세상이란

 

여기 나비 노니는데

저기 거미집 있네

 

 

*
할머니가 말하셨다
아주 사소한 일
바늘에
실 꿰는 것도 온몸으로 하거라

 

요즘은 바늘구멍이 안 보여

 

 

 

 *

어미가 새끼 부를 때

새끼가 어미 부를 때

그 분주한 새소리

앞산의 다른 새들도 듣는다

 

 

 

*

어찌 꽃 한송이만 있겠는가

저쪽

마른 강바닥에도 아랑곳하게나

볼품없음이

그대 임이겠네

 

 

 

*

급한 물에 떠내려 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


이렇게 시작해 보거라


 

*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들녘을
물끄러미 보다
한평생 일하고 나서 묻힌
할아버지의 무덤
물끄러미 보다

 

나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

어쩌란 말이냐
복사꽃잎

빈집에 하루 내내 날아든다

 

 

 

 *

봄바람에

이 골짝

저 골짝

난리 났네

제정신 못차리겠네

아유 꽃년 꽃놈들!

 

 

 

 *

친구를 가져보아라
적을 안다
적을 가져보아라
친구를 안다
 

이 무슨 장난인가

 

 

 

 *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천개의 물방울

 

비가 괜히 온 게 아니었다

 

 

 *

이런 날이 있었다

길 물어볼 사람 없어서

소나무 가지 하나

길게 뻗어나간 쪽으로 갔다

 

찾던 길이었다

 

 

*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의 말인가

푸른 잣나무 가지에

쌓인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

 

 

*

비 맞는 풀 춤추고

비 맞는 돌 잠잔다

 

 

*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모두 무죄입니다

 

 

 

  

 

고은 詩 *

-순간의 꽃 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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